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중동전쟁 (문단 편집) === [[아랍 연맹]] ===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지역의 아랍인들은 국가적 무장단체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청년 측의 무장 조직이 있었다. 약 11,000~12,000명 정도가 존재했으며 크게 후샤니 후타와 후샤니 나즈다 두 파벌로 분리되어 있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 진영은 100만이 넘는 인구에 비하면 병력이 아주 부족했는데 이는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 당시 영국군이 이를 철저히 분쇄하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 속한 아랍인 청장년 층의 상당수가 전사, 부상, 투옥, 망명하게 되면서 전투인원의 심각한 부족에 시달리고 무엇보다도 전투경험이 있던 세대가 증발하고 무기도 영국 당국에게 압수되면서 전투력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전쟁발발 이후 '''팔레스타인 민족방위군'''이 새로 조직되었으며 12월 [[https://en.wikipedia.org/wiki/Abd_al-Qadir_al-Husayni|압드 알 카디르 후세이니]]는 시리아에서 훈련된 100여 명의 '''아랍 성전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몇몇 지원자들과 영국군 출신의 [[베테랑]]들과 합류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민족방위군'''의 무장은 매우 열악했는데, [[1942년]] [[https://en.wikipedia.org/wiki/Yishuv|이슈브]]([[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유대교도]] [[자치정부]])의 첩보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아랍인 진영에는 약 5만여 정의 화기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지만 굉장히 낡고 신뢰도가 낮았다고 한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자경단 조직들과 무관하게 개인적으로도 영국 식민부의 민정청에게 총기를 요청하고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여 총을 사서 조달하기도 했다. [[아랍 연맹]]은 다양한 아랍국가에서 지원한 6천여 명의 자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아랍 해방군'''을 조직했고 [[https://en.wikipedia.org/wiki/Fawzi_al-Qawuqji|파우지 알 카우크지]]의 지휘 아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북부 지역과 [[사마리아]]에 파견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아랍인 진영의 극심한 분열 때문에 이들은 눈곱만큼도 연합작전을 펼치려 하지 않았고 각자 이스라엘과 비밀협상하면서 경쟁 파벌을 회치는 것을 도모했다. [[트란스요르단]]은 위에서 서술했듯이 영국군의 훈련하에 정예부대를 보유했으며 8천~1만2천 명 규모의 부대가 4개의 보병 및 기계화연대로 조직되어있었으며 40문의 야포와 75대의 장갑차를 보유했었다. 가장 잘 훈련된 요르단군은 초기에 이스라엘군의 공세를 격퇴하고 유대인들을 철저히 압도하면서 유일하게 잘 싸웠다. 트란스요르단이 전쟁에 참여하는 동기에는 다음같은 배경이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근원은 일반적으로 영국의 [[맥마흔 선언]]과 [[벨푸어 선언]]으로 평가되는데, 여기서 맥마흔 선언 당사자들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후세인 빈 알리]]였다. 이후 [[트란스요르단]]의 국왕이 되는 인물이 압둘라 1세인데 그 왕이 바로 '''맥마흔 선언의 당사자인 [[후세인 빈 알리]]의 아들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시절만에도 팔레스타인에겐 아랍 민족주의는 있어도 완전 독립국가라는 개념으로서의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는 없었다. 아랍제국이나 아랍연합국의 일부로서 팔레스타인 정부를 추구한다는 의미의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당시에 발생한 팔레스타인의 아랍 봉기의 사상은 아랍 민족주의였지, 완전히 독립된 국가로서의 팔레스타인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리고 논란 자체는 존재하지만 압둘라 1세가 이스라엘과 밀약을 맺어서 팔레스타인을 갈라먹었다는 증거는 없다.[*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2016) 참고] 그리고 트란스요르단은 영국에게 배신당하여 잃어버렸던 기회를 잡게되는데 바로 제1차 중동전쟁이다. 그런 이유로 참여 목적이 다른 아랍 국가들과 달랐다. [[이라크 왕국]]은 12개 여단 21,000명의 군대를 보유했으며 영국제 전투기 100여 대로 이루어진 [[공군]]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초기에 4개 보병여단을 파견했으나 최종적으로 만5천 명에서 만8천 명까지 증파했다. 5월 15일에는 이라크 공병대가 요르단 강에 가교를 건설하여 이스라엘 정착촌을 공격, 아주 조금의 성과를 거둔 바는 있다. 이후, 나블루스-예닌(제닌)-툴칼람 삼각지대 내에서 이스라엘군의 발악으로 격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위치를 고수한 바 있으며 이라크군은 예닌 지역을 사수하던 중 종전을 맞이했다. 그나마 좀 나은 케이스. [[이집트 왕국]]은 초기에 9천명을 파견했는데 전황이 악화되자 최종적으로 4만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이집트의 파병 목적은 요르단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과 레바논과 시리아를 합병해서 아랍의 맹주로 나대는 꼴을 봐줄 수 없다는 정치적인 목적이었지, 이스라엘과 열심히 싸우겠다는 의지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따라서 작전 수립 과정에서 군부는 철저히 배제되었고 내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계획적으로 병력을 축차투입했다. 거기에 파루크 1세는 어차피 싸움은 요르단군이 다 해주겠지만 겁쟁이 시오니스트 깡패들은 이집트군을 마주치면 다 겁에 질려 달아날 거라는 민족주의적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 황당한 판타지를 공유한 [[아랍 연맹]]의 회원국들은 이후로도 이스라엘에게 처참하게 패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게다가 이집트군은 규모는 꽤 되었으나 영국군의 철저한 통제 하에서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일이 없었으며 주 목적은 국내 치안유지였기에 해외원정이라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할 여력 자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보급체계가 눈물겨워 국가 경계선 지역에만 병력을 배치했다. 초기에 병력 만명으로 구성된 원정군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 파견되었으며 영국제 25파운드 포 6문과 6파운드 대전차포 8문, 1정의 중기관총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집트 공군은 30기의 스핏파이어와 4기의 허리케인, C47 20기 등으로 폭격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착촌이 조금만 저항하면 겁을 먹고 전투를 회피해서 전략적 요충지는 하나도 점령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병력이 산개되었으며 이스라엘군이 아니라 가자 지구의 아랍인들을 더 공격했다.(...) [[시리아]]는 3개 보병연대로 구성된 만2천여 명의 병력과 전차대대를 파견하였다. 5월 15일부터 16일에 이들은 이스라엘의 제마크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한 바 있으나 며칠 뒤에 다가니아에서 패주한다. 전반적으로 시리아군은 방어로 돌아선 6월 10일 이후 소규모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스라엘의 정착민 촌락에 소규모의 공격을 가했다. 시리아의 참전 목적은 압둘라 1세가 시리아를 합병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함이었고 제일 싸울 의사가 없는 나라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시리아는 전쟁 발발 직후에 그냥 팔레스타인 아랍인 진영에 무기와 자금만 지원하고 정규군을 투입하지 말자고 제안했으나 야심에 활활 불타던 압둘라 1세에게 씹혔다. [[레바논]]은 규모가 작은 3천5백 명의 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천여 명의 침공군은 북부 갈릴리를 지나 이스라엘군과 교전하였으며 결국 1949년 3월 23일 휴전협정에 사인해 버렸다. 레바논 역시 압둘라 1세가 레바논을 합병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